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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자유게시판

 

그리스도 왕 대축일(연중 마지막 주일)

“나는 왕이다!” 누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이들이 물끄러미 쳐다볼 것이다. 시대 착오라는 생각을 한다. 왕이니 임금이니 군주니 하는 표현 자체를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시대 사극의 산물들로 여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내건 현대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로 보인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숨겨진 ‘왕국’이 있다. 왕의 개념이 있고 임금노릇을 하고 군주처럼 행세하는 경우들이 있다. 아이들이 또래끼리 모여서 놀 때에는 골목대장 같은 것이 있다. 그들의 지도자격이다. 간혹 골목대장이 독재를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여러 삶의 체험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는다. 그리고는 자기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성채를 쌓는다. 그것은 가능하고 다른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런 것이라고 알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점차 제외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성(城)에 울타리를 친다. 그 안에서 왕노릇을 한다. 자기가 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그리고 그 성을 굳건히 지키려고 결코 양보를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성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 없다.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 성을 굳건하게 지키려 애쓴다. 이것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 속에 지어놓은 왕국이다. 민주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도 대부분은 그러한 사고와 의식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게 말할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은 매우 합리적이고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사고를 보편적으로 갖게 되었다. 합리적 사고로 인간 지성의 자각과 과학이 크게 발전하였지만, 인간은 스스로 최고이며 온 세상을 인간이 지배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시대 사조와 사상이 그랬다. 전통적이고 인간 중심의 고유한 가치를 점차 도외시하였다. 더 나아가 신앙의 가치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신앙은 이성을 근거로 결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가치이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앙의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생겼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날은 1925년에 제정되었다.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첫째의 것(Quas primas)"이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장엄하게 지낼 것을 명하였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단지 피조물일 뿐이며 주님이시고 왕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신앙고백을 이날 선포하고 있다. 물론 교회는 다른 축일들(주님 공현, 부활, 승천 대축일)을 통해 왕이신 그리스도를 주된 주제로 기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따로 지내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1970년에 와서 이 축일을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제34주일)에 지내도록 지정하였다.
 
이날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경축한다. 본기도와 감사송에서, 인류를 죄악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 바로 만민의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가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임을 고백한다.
 
말씀 전례는 가나다 해의 3년 주기로 되어있으므로 풍부한 성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직접 묘사된 구절이 봉독된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가해, 마태 25장)을 보여주며,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나해, 요한 18장)을 들려준다. 또 십자가 오른편의 죄수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복음이 봉독된다(다해, 루가 23장).
 
이날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전례적으로 새해가 시작되기 전 주일이다. 진정한 우리의 왕이시며 마지막날에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실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왕권에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기도해 보자. 그리고 나만의 성채를 깨고 나의 성안에 진정 주님을 나의 임금으로 모시도록 하자.
[이 글은 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님께서 경향잡지(2001년 11월)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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